용주사(龍珠寺)의 가을 정취

효심과 수행이 간직된 사찰 김영열 기자l승인200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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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과 천연기념물 264호인 회양나무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였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였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자 한중록(閑中錄)의 작자로 유명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1735~1815). 사도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는데 그가 이처럼 어린 나이에 세자의 책봉을 받았던 건 그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이미 사십의 나이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한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외웠다고 하며, 7세때에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의 내용을 완전히 익혔으며, 또한 수시로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이미 군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하게 갖추었지만 당파의 정략적 음모와 계략으로 갑작스럽게 기행과 패륜을 일삼게 되었다.

   
▲ 용주사 입구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25)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자를 둘러싼 노론(老論)·소론(少論)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부왕과 세자의 원만했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한다. 즉, 어린 시절부터 노론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냈던 세자가 정사를 맡게 되자 노론세력과 그 동조세력인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숙의문씨(淑儀文氏) 등이 세자를 계속 모함하였으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여 수시로 세자를 꾸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종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세력의 영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았고, 이어 1761년(영조 37)과 그 이듬해에 걸친 나경언(羅景彦)등의 상소로 인해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 정조는 열한살의 나이로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고 비록 할아버지인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즉위 이후에 보여준 그의 효성스러움을 본다면 얼마나 부친의 죽음에 대해 비통스러워 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25세가 되던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부친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당쟁의 탕평을 위해 진력, 즉위하자 곧 부친을 장헌세자로 추존(追尊)하였으며, 노론의 당론을 앞세우던 벽파(僻派)의 일당인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홍상간(洪相簡)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했다.

   
▲ 부모은중경 탑

하지만 정조는 부친의 죽음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을 홀로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해주었고, 노론에 세력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의 젊은 관료들도 적극 등용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세손시절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홍국영(洪國榮)마저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탕평의 노력으로 인해 정조대는 정칟사회·문화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일부에서는 이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조의 치적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정사 못지않게 비명에 간 부친을 추모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대표적 성군(聖君)으로 세종(世宗)과 정조를 들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모습, 즉 탁월한 정치능력과 풍부한 인간미가가 겸비된 데서 따르는 평가인 것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일화는 정조가 얼마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있다.

양주땅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긴 정조대왕은 자나깨나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져간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경(還京)길에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陵寺)를 당부하곤 하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러치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총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대왕의 눈에 띄자 순간 대왕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하느냐" 하고 송총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대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 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隆建陵) 주변에서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각
위의 이야기를 통해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살펴볼 수 있다. 용주사의 창건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용주사가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음도 정조의 정신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용주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정조의 왕권 강화 노력과 불교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수원성 축조, 사도세자묘의 천릉(遷陵), 용주사의 창건 등의 사례가 왕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조선왕실의 능침사찰(陵寢寺刹) 건립이 100여년 이상 중단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용주사 창건을 추진하였다는 사실과, 용주사 이후에는 능침사찰의 건립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 없이는 창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또한 재위 초기에 억불의 성향을 보이던 정조가 불교관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지극한 효성을 간직한 정조는 즉위 이후에 부친을 추모하는 일과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첫번째로는 존호(尊號)를 고치는 일로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된 부친의 신분을 다시 세자로 복원시켰으며 그 이름을 장헌(蔣獻)이라 하였다.

   
▲ 용주사 경내 전경
그 다음은 사당을 고치는 일이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은 1764년 (영조 40) 봄에 북부의 순화방(順和坊)이라는 곳에 세웠다가 같은 해 여름 동부의 숭교방(崇敎坊)에 옮겨 지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지어졌으며 그 이름도 수은묘(垂恩廟)에서 경모궁으로 바꾸었지만 부친의 묘가 원(園)이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효성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묘 이전 작업은 1789년 즉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되서야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조금 의문점이 남지만 그가 수원지역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여러 대규모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심지여는 행궁(行宮)을 짓고 도읍까지 옮기려 했다는 점을 본다면 부친의 묘를 둘러싼 일종의 웅대한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는 추측이다. 특히 수원성은 당대의 북학파(北學派)를 중심으로 한 실학사상가들이 동원되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工法)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용주사의 창건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 1789년 10월 7일)이라 한 후로부터 4개월 뒤 용주사의 창건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묘의 이전과 동시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게 한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정조는 처음 불법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우연히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이라는 승려를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 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바치자 그것을 읽고 마음에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한다.

   
▲ 용주사 입구의 공원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가지로 설명하지요,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가 네 번째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는 다섯 번째지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것이 그 여섯 번째이고,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은 일곱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말하고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것이 아홉 번째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가 열 번째입니다."

이에 감동받은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했으며 보경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경을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主寺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리하여 용주사는 대단히 큰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고, 창건자료집 각항택일(各項擇日)과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두 자료를 종합하여 본다면 주요 공사 기간은 7개월여 정도 소요됨을 알 수가 있는데, 사찰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7개월이라는 공기(工期)는 대단히 단축된 것이다.

또한 창건에 동원된 인적 구성과 재물의 양을 통해 쉽게 알려주는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 designtimesp=15380>에는 큰 시주를 한 96명의 고위관료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龍主寺建築時各道化主僧) designtimesp=15381>이라는 자료엔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지방의 책임을 맡은 승려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보경당 사일(寶鏡堂獅馹)과 성월당 철학(城月堂哲學)이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천보루 왼쪽에 있는 불음각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 (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 designtimesp=15384>에는 제목 그대로 각 궁고 호조·병조등의 중앙관청, 그리고 서울의 각 가게에서 전국에 이르기 까지 분야별로 시주한 내용이실려있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절의 모습은 창건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원래의 건물에 낡고 기운 곳을 바꾸고 바로잡아 큰 골격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와서 많은 전각이 새로 들어섰고 1983년 서정대 주지스님이 취임한 후 1985년 불음각의 신축을 시작으로 1986년에 중앙선원, 1987년에 매표소, 1988년에 효성각, 그리고 1993년에 천불전을 조성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용주사의 천연기념물인 회양나무는 높이가 4.5m, 가슴높이의 둘레가 0.58m로 한때 가지의 폭이 3.5m에 달했으나 지금은 앙상한 몸체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나무는 조선 정조(正祖1776~1800재위)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에 봉하고 능사로서 용주사를 중건할 때 손수 심은 기념식수라고 전해진다. 대웅전은 1790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회양목의 수령은 대략 200여 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용주사 경내 대웅전 계단 아래에 있는 회양나무는 수령이 많아 천연기념물 제264호로 지정하여 보호받고 있다. 용주사 입장료는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는 700원이다. 단체인경우 할인혜택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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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열 기자  sisatime6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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