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속 여인] 조지 프레데릭 와츠의 ‘희망’

시사타임l승인2018.03.04l수정2018.03.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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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프레데릭 와츠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Watts Gallery 소장

19세기의 영국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1817~1904)의 희망이라는 작품이다. 희망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림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프레데릭 와츠의 미노타우로스의 작품을 보고 그의 색과 전달하고자 하는 우의적 화풍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가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불확실한 현실의 어두운 한가운데서 그는 수금 끝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을 보면서 인생의 목표를 잡고 한 줄 남은 수금의 현을 통해서 용기를 얻었다.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서 절망하지 않고 끝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두울수록 별은 빛나고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더욱 빛을 낸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존재 한다는 것을.

왜 화가는 절망적인 그림에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참 아이러니컬하다. 아무리 보아도 희망이라는 것을 느껴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참만에야 한 가닥 희망을 찾아냈다. 그것은 간간히 붙어있는 한 줄의 현이었다. 무릎을 탁치고 작가가 관람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사고를, 모든 상황이 환멸적일지라도 꿈이나 기대의 환상이 깨지지 않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한 여인이 둥근 구위에 앉아 현을 움직이려 하고 있다. 그녀의 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고 얇은 그녀의 옷은 간간히 피부를 감싸고 있으며 맨발에 위태로움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처럼 생긴 구는 물위를 떠다니고 있으니 그녀의 앉아 있는 그 자체가 어떻게 앉았더라도 그녀는 불편할 것이다. 단지 둥근 구위에서 무엇인가를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열심히 음악을 창조해 내려는 그녀의 악기는 줄이 끊어져 있고 오직 한 줄만이 남아 있다. 깊은 사색에 잠긴 그녀는 한 줄 남아 있는 악기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녀의 손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긴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간절한 음악이 만들어 질지 말이다. 오직 한 줄만이 남아 있는 악기에 기대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연주의 음을 연주 할 것 같다.

조지 프레데릭 와츠(1817~1904)는 영국의 화가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가난한 피아노 직공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프레데릭은 영국의 미켈란젤로라는 호평을 받았으나 몹시 내성적인 성격으로 비타협적으로 세속적인 명예에는 집착하지 않는 예술가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친 화가이다. 사회적 존재로 행동과 성격을 표현하는 사회성 강한 그림을 그리면서 시대의 이단아로 혼자 오랜 시간 삶의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낸 것일까? 자신의 삶을 여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일까?

그림의 제목은 희망으로 전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눈은 가려져있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인가. 보이는 것보다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와츠의 감정일까? 희망이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현실과 이상, 또 하나는 현재와 미래를 나누고 있다. 현실과 현재는 행위에 속하며 이상과 미래는 희망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녀의 행위 즉 물위에 떠 있는 구에 앉아있는 그녀는 매우 위태로우나 미래는 한 줄의 현으로 이상과 미래를 희망으로 꿈꿀 수 있으니 그녀의 절망은 분명히 미세하게 떨리는 현의 소리로 희망을 짐작한다.

이 그림에서는 희망이 그곳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곧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진다. 그녀의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나 두 다리가 몸의 버팀목이 되어 균형을 잡고 있다. 물은 출렁거린다. 출렁거린다는 것은 곧 얼마가지 않아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을 의식하며 현을 어루만지고 있다.

절망이 가져다 주는 희망. 불안한 현실에 간절히 희망을 원하는 여인은 한 가닥 남은 현에 온 정성을 다하여 희망을 연주하려 한다. 희망은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위태롭다는 사실을 잊게 해 준다. 악기의 현이 다 끊어져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도 잊게 해 준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인간의 미래에 절박함으로 여인은 현을 치고 있다. 한 가닥 남은 현에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을 느낄 수 있게 여인은 귀를 기울인다.

▲ 서양화가 베로니카 유 미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그림 속에는 신비스럽게도 다른 희망이 보여지고 있다. 여인은 얼마만큼의 긴 기다림과 인내심으로 희망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여인에게 무너져 버린 세속적 희망은 수금의 한 줄 남은 악기에서 다시 생겨나고 있다. 조지 프레데릭 와츠는 절망적인 곳에서 다시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자신의 내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의 힘겹고 벅찬 삶 속에서 한 가닥의 실낱 같은 희망을 볼 수 없다면 이 현실이 얼마나 힘겨울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벅찬 삶의 형태를 보편적인 내용으로 전달하며 이것을 추상적인 내용으로 상징화시키고 우리에게 더 자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조지 프레데릭 와츠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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