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화> 자유기고가 / 전 뉴시스통신기자 / 본지 객원 편집위원

고전에 나오는 어진 임금이나 명재상이 한 말이 아니다. 현재 중국 정계의 실력자로 알려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불과 며칠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원 총리는 지난 5일 유럽 순방을 앞두고 가진 유럽 5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잠들기 전에 무슨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어떤 문제로 종종 잠 못 이루는갚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 ‘이소(離騷)’의 한 부분 “내 긴 한숨과 남모르는 눈물은 고통 받는 백성이 애처로워(長太息以掩涕兮，哀民生之多艱)”를 읊었다.

원 총리는 이어 “유명한 시와 저작을 인용하는 것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책을 읽으며, 무슨 문제를 고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중국의 옛 시구와 서방의 명언들을 줄줄 읊었다.

원 총리는 청나라 건륭제 때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정판교(鄭板橋)가 쓴 시 ‘무제(無題)’의 일부인 “관저에 누워 대나무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이 고통 받는 소리 같다(衙齊臥聽蕭蕭竹, 疑是民間疾苦聲)”를 인용할 때는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원 총리는 이날 모두 6편이나 되는 옛 글을 줄줄 읊었다. 원 총리가 읊은 글 중에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한 구절과 중국 현대 시인 아이칭(艾靑)의 ‘나는 이 땅을 사랑해’의 한 구절 “왜 내가 항상 눈물을 머금고 있느냐면 이 땅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기 때문이다”도 포함됐다.

인터뷰에 참가했던 한 기자는 “비록 원 총리가 사전에 질문 내용을 전달받고 준비한 구절들이었지만 그의 심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원 총리의 이날 인터뷰가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정치권과 비교해볼 때 그 지식의 수준과 자신감이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 정치인 가운데 간혹 옛 시구나 경구를 읊은 사람이 있었지만 이처럼 “고통 받는 백성을 생각”하거나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은 없었다. 선거에 패하고 물러나는 소회를 읊거나 기자들의 무식(?)을 조롱하는 형태의 경구를 내뱉은 이는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정치인의 독서는 백성을 위한 것"

중국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라고 하기는 어렵다. 반면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해 좋은 나라, 잘사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정치인의 수준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 총리는 “세상을 보여주는 건 재물이 아닌 1만권의 책”이라며 독서에 대한 진한 애정을 함께 나타내기도 했다. 더 타임스, 로이터, 헬싱키타임스 등 서방 언론들은 중국의 ‘독서광’ 총리에게 반했다. 다음 날인 6일자 외신들은 그가 중국 정치와 경제, 사회발전, 유럽과의 관계 등에 대해 풍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명 강의를 했다고 평가했다. 더 타임스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인용하며 정치 철학을 설파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엘리트 정치인 의 진면목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이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보도가 나가면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독서가 뭇사람들에게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러나 정치인의 독서는 뭇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닌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에 문제다. 독서를 통해 배우고 느낀 바를 백성을 다스리는데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느냐는 실용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 정치인들이 약한 것이 아닐까...

원 총리는 백성들의 앞에서 수차례 눈물을 보여줬다. 비록 진정에서 나온 문물이 아닐지라도 그 눈물은 값지다. 우리 정치인처럼 자신의 패배를 아파하는 눈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자를 모르고, 중국어를 모르는 서방의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한시를 읊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과시(?)하는 중국 총리의 자신감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