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요.”

꿈을 말할 때 은민(14ㆍ여ㆍ가명)이의 얼굴은 그제서야 환하게 빛났다. 수줍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 날’의 일을 물었을 때 굳게 말문을 닫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2년 전 5월은 은민이에게도 어머니 서영순(38ㆍ가명)씨에게도 조각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5월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은민이는 학교 앞 골목길에서 후진하던 화물트럭에 부딪혀 얼굴과 머리를 크게 다쳤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일주일 후 은민이는 기적처럼 눈을 떴다. 이어진 8시간의 대수술. 압박붕대를 얼굴에 친친 동여매고 나타난 딸의 모습 앞에 엄마는 주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은민이가 사고를 당한 곳은 다름 아닌 ‘어린이 보호구역(School Zone)’.

정부가 어린이 교통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며 10년 전부터 의욕적으로 만든 공간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고가 일어난 곳에는 보호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속도제한 표시가 있었다. 하지만 표지판 만으로는 ‘보호’가 불가능했다.

이 곳에는 늘 불법 주차 차량이 보도를 점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아이들은 차 사이를 비집고 다니거나 아예 차도가 보도인 것처럼 그 위를 걸어 다녔다. 지나가는 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도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어요. 마땅히 관리 책임을 져야 할 학교가 도의적인 책임만을 되뇌는 것만 봐도 이 제도가 얼마나 형식적으로 운영되는지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 어머니 서씨는 이제 화를 낼 힘도 없어 보였다.

사고의 대가는 혹독했다. 얼굴은 원래 모습을 거의 되찾았지만 한쪽 청력을 잃었다. 후유증으로 초점 없는 오른쪽 눈이 온전치 못해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엄마와 딸의 바람은 소박하지만 분명하다. “사고 후 너도나도 안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도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나 이들 모녀의 기대와 달리 어린이날을 하루 앞두고 다시 찾은 사고 장소에는 여전히 불법 주차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차 뒤에 가려져 있던 아이들은 불쑥불쑥 모습을 내밀었다.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표지판이 아직도 붙어있었지만, 그 곳은 여전히 ‘위험 구역’이었다.